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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댄디보이 시인, 박인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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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보다 사랑, 사랑보다 예술(13)

훤칠한 키에 용모가 수려한 박인환은 당대 문인 중에서 최고의 멋쟁이, ‘댄디보이’였다. 서구 취향에 도시적 감성으로 무장한 그는 시에서도 누구보다 앞서간 날카로운 모더니스트였다. 그는 여름에도 곧잘 정장을 차려 입고 나타나서는, “여름은 통속이고 거지야. 겨울이 와야 두툼한 홈스펀 양복도 입고 바바리도 걸치고 머플러도 날리고 모자도 쓸 게 아니냐?”라고 불평을 하곤 했다.

명동의 술집 마담들도 늘 외상술을 마시는 미남자 박인환을 차마 미워하지 못했다. “또 외상술이야?” “어이구, 그래서 술을 안 주겠다는 거야?” “내가 언제 술을 안 주겠다고 했나?” “걱정 마. 꽃피기 전에 외상값 깨끗하게 청산할 테니까.” 시인은 늘 호주머니가 비어 있었지만 한 점의 비굴함도 없이 그렇게 당당하고 거침이 없었다.

6·25 전란으로 폐허가 되었다가 차츰 복구되어 제 모습을 찾아가던 1956년의 이른 봄. 명동 한 모퉁이에 자리한 막걸리를 주로 파는 ‘경상도집’에 박인환을 비롯해 송지영, 김광주, 김규동 등의 문인들이 모여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마침 그 자리에는 가수 나애심도 함께 있었다. 몇 차례 술잔이 돌고 취기가 오르자 일행은 나애심에게 노래를 청하였다. 그러나 나애심은 마땅한 노래가 없다고 청을 거절했다. 이때 박인환이 호주머니에서 종이를 꺼내더니 즉석에서 시를 써내려갔다. 이어 완성된 시를 이진섭에게 넘겼고, 이진섭은 단숨에 악보를 그려갔다. 나애심이 그 악보를 보고 노래를 불렀다. 그 노래가 바로 '세월이 가면'이다.

한두 시간 후 나애심과 송지영은 돌아가고 테너 임만섭, 소설가 이봉구 등이 새로 합석을 했다. 임만섭이 이 노래를 정식으로 다듬어서 부르자 지나가던 행인들이 모두 이 술집 문 앞으로 모여들었다. 아주 기이한 음악회가 열린 것이다. 술집에서 대폿잔을 기울이면서 아름다운 시를 쓰고 작곡을 하며 노래를 부르는 사람들... 그리고 그들을 지켜보며 박수를 보내는 관객들. 그것은 마치 낭만적인 영화의 한 장면 같기도 했다. 이후 박인환의 '세월이 가면'은 여기저기서 사람들에 의해 흥얼거려졌다. 그리고 마치 명동의 골목마다 스며있는 외로움과 회상을 담고 있는 듯한 이 노래는 ‘명동 엘리지’라고도 불리었다.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의 눈동자 입술은
내 마음에 있어

바람이 불고
비가 올 때도
나는 저 유리창 밖
가로등 그늘의 밤을 잊지 못하지

사랑은 가도
과거는 남는 것
여름날의 호숫가
가을의 공원
그 벤치 위에
나뭇잎은 떨어지고
나뭇잎은 흙이 되고
나뭇잎에 덮여서
우리들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의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어
내 서늘한 가슴에 있건만

강원도 인제에 위치한 ‘박인환 문학관’ 전경 <사진=이철환>

박인환(朴寅煥, 1926∼1956)은 1926년 강원 인제에서 태어났다. 이후 경성제일고보를 거쳐 평양의전을 중퇴하였다. 8·15 광복과 함께 상경한 이후 종로에서 ‘마리서사(茉莉書肆)’라는 서점을 경영하였다. 이때 김광균· 이한직· 김수영· 김경린· 오장환· 김기림 등 시인들과 친교를 맺게 된다. 1948년 서점을 그만두면서 이정숙과 혼인하였다. 그 해에 자유신문사, 이듬해에 경향신문사에 입사하여 기자로 근무하기도 하였다.

그의 시작 활동은 1946년에 시 '거리'를 ‘국제신보(國際新報)’에 발표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특히 1949년 김수영· 김경린· 양병식· 임호권 등과 함께 낸 합동시집 《새로운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은 광복 후 본격적인 시인들의 등장을 알려주는 신호가 되었다. 1950년에는 김차영· 김규동· 이봉래 등과 피난지 부산에서 동인 ‘후반기(後半紀)’를 결성하여 모더니즘운동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영화에도 관심을 가지고 있던 그는 《아메리카 영화시론(試論)》을 비롯한 많은 영화평을 쓰기도 했으며, 미국의 극작가 테네시 윌리엄스가 쓴 희곡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를 번역하기도 했다.

1955년에 발간된 《박인환선 시집》에는 '살아 있는 것이 있다면', '밤의 미매장(未埋藏)', '목마와 숙녀' 등의 작품이 게재되었다. 특히 '목마와 숙녀'는 대표작으로 꼽히는 작품으로서 우울과 고독 등 도시적 서정과 시대적 고뇌를 노래하고 있다.

한 잔의 술을 마시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와
목마를 타고 떠난 숙녀의 옷자락을 이야기한다
목마는 주인을 버리고 거저 방울소리만 울리며
가을 속으로 떠났다 술병에서 별이 떨어진다
상심한 별은 내 가슴에 가벼웁게 부숴진다
그러한 잠시 내가 알던 소녀는
정원의 초목 옆에서 자라고
문학이 죽고 인생이 죽고
사랑의 진리마저 애증의 그림자를 버릴 때
목마를 탄 사랑의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세월은 가고 오는 것
한때는 고립을 피하여 시들어가고
이제 우리는 작별하여야 한다
술병이 바람에 쓰러지는 소리를 들으며
늙은 여류작가의 눈을 바라다보아야 한다

…… 등대에……

불이 보이지 않아도
거저 간직한 페시미즘의 미래를 위하여
우리는 처량한 목마 소리를 기억하여야 한다
모든 것이 떠나든 죽든
거저 가슴에 남은 희미한 의식을 붙잡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서러운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
두 개의 바위 틈을 지나 청춘을 찾은 뱀과 같이
눈을 부릅뜨고 한 잔의 술을 마셔야 한다
인생은 외롭지도 않고
거저 잡지의 표지처럼 통속하거늘
한탄할 그 무엇이 무서워서 우리는 떠나는 것일까
목마는 하늘에 있고
방울소리는 귓전에 철렁거리는데
가을바람 소리는
내 쓰러진 술병 속에서 목메어 우는데 

박인환은 통속을 혐오하고, 원고 쓸 때는 구두점 하나에도 신경질적으로 까다롭게 굴고, 싫어하는 사람과는 차도 한 잔 함께 마시지 않는 결벽증을 드러냈다. 수주(樹州) 변영로(卞榮魯)가 금주를 선언하자 그를 찾아가 술을 마시지 못하는 사람은 선배 자격이 없다며, 앞으로는 ‘선생’ 자를 떼겠다고 으름장을 놓기도 했다.

낭만과 우수에 젖은 명동거리를 누비며 시대를 앞서가는 시를 쓰고 자유분방한 삶을 살던 천재 시인 박인환은 1956년 3월 20일 밤 9시에 세상을 떠난다. 그가 명동의 ‘경상도집’에서 송지영, 김광주 등과 어울려 막걸리를 마시며 '세월이 가면'을 써낸 지 일주일이 지난 뒤였다.
이상(李箱)을 유별나게 좋아한 그는 이상의 기일(忌日)인 3월 17일 오후부터 주변 사람들과 함께 이상을 추모하며 폭음을 하였다. 이날부터 사흘 동안 매일 술을 마셨다. 그로부터 사흘 뒤 밤 9시에 만취상태로 세종로의 집에 돌아온 그는 가슴을 쥐어뜯으며 “답답해! 답답해!”를 연발했다. 그러다가 자정 무렵 “생명수를 달라!”는 부르짖음을 마지막 말로 남기고 눈을 감았다. 갑작스런 심장마비였다. 그의 나이 불과 삼십 세였다.

박인환의 갑작스런 죽음에 놀라 21일 새벽 그의 집으로 모여든 친구들은 차디찬 방에 눈을 치뜬 채 꼿꼿이 누워있는 그의 시신을 망연히 바라보았다. 그 치뜬 눈을 감겨준 것은 송지영이었다. 또 다른 친구가 그의 시신에 위스키 ‘조니 워커’를 따라주었다. 그의 시신이 시인장(詩人葬)으로 망우리에 묻힐 때 지인들은 그가 좋아했던 조니 워커와 카멜 담배를 함께 묻었다. 그 자리에서 시인 모윤숙이 고인의 시를 낭송하였고 친구인 시인 조병화가 조시(弔詩)를 읽었다.

"인환이 너 가는구나
대답이 없이 가는구나
너는 누구보다도 멋있게 살았고
멋있는 시를 쓰고..."

박인환 시인의 문학적 열정과 업적을 기리는 박인환문학관과 내설악 예술인촌 공립미술관이 강원도 인제군에 2012년 10월에 개관되었다. 인제군에서 태어난 시인 박인환의 얼을 기리고자 인제산촌민속박물관 옆에 건립된 박인환문학관은 시인 박인환이 집필하던 시절의 공간을 전시실에 구성하여 옛 향수를 느낄 수 있다.

전시실에는 박인환 시인이 활동한 한국전쟁 후의 사회적·문화적 상황과 시인과 관련된 인물, 서점, 다방, 선술집 등의 역사적 명소를 현실감 있게 재현하고 있다. 또한 문학관 바로 곁에는 ‘시인 박인환 거리, 목마와 숙녀’, ‘시인 박인환 거리 아치조형’, ‘시가 열리는 나무’, ‘책 읽는 목마’, ‘하늘이 비치는 시 벤치’, ‘시인의 꿈’ 등 6개의 공공미술 작품도 설치되어 있다.

이철환 객원 편집위원 mofelee@hanmail.net (전 재정경제부 금융정보분석원장, 한국거래소 시장감시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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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크라이나 안보 지원 강화 기대감으로 방산 수요 증가 직접적. 미·러 긴장 완화 불확실성 속에서도 방위산업 매출 안정성 강화 예상됨.

부정 영향 종목

  • Caterpillar Inc. Industrials
    우크라이나 전쟁 장기화 시 건설 및 중장비 수요 불확실성 직접적. 글로벌 인프라 투자 지연으로 매출 성장 둔화 가능성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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