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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승주의 수선전도] '정릉의 눈물' 담긴 정릉 없는 정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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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가 조성하고 아들 태종이 해체한 신덕왕후 정릉 이름 딴 정동
태종과 '혁명동지'에서 '철천지 원수'로 돌아선 신덕왕후

[편집자] 수선전도(首善全圖)는 조선의 수도 한양을 목판본으로 인쇄한 지도입니다. 대동여지도를 제작한 고산자(古山子) 김정호가 만든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북쪽 도봉산부터 남쪽 한강에 이르기까지 당시 서울의 주요 도로와 동네, 궁궐 등 460여개의 지명을 세밀하게 묘사했습니다. 수선전도에 있는 지명들은 지금도 곳곳에 남아 있습니다. '오승주의 수선전도'는 이 지도에 나온 동네의 발자취를 따라 지명과 동네에 담긴 역사성과 지리적 의미, 옛사람들의 삶과 숨결 등을 살펴보고 이를 통해 오늘 숨가쁜 삶을 사는 우리 자신을 되돌아볼 계획입니다.

[서울=뉴스핌] 오승주 기자 =서울 성북구 북한산 자락 동편에 자리잡은 정릉(貞陵)은 조선 태조의 계비(繼妃·두번째 왕비) 신덕왕후(神德王后)의 안식처다. 동네 이름도 정릉동인 만큼 일대에서는 랜드마크 역할을 한다.

그런데 이 정릉의 원래 위치는 여기가 아니다. '덕수궁 돌담길'로 유명한 서울 중구 정동(貞洞)이었다.

도성 안에 능을 조성하지 않는다는 원칙까지 깨고 서울 정동에 만들어졌던 정릉이 북한산 중턱 산골짜기로 파묘천장(묘를 파서 다른 장소로 이전)한 이유에는 조선 건국을 위해 의기투합했던 두 혁명 동지가 철천지 원수로 변해가는 과정이 담겨 있다.

지금은 동네 전체가 도심속 공원 역할을 하는 고즈넉한 정동. 그러나 서울 정동에는 620여년전 '조선의 국모' 신덕왕후의 눈물과 '피의 군주' 태종의 한맺힌 노여움이 세월을 넘어 엮여 있다.

◆'조선의 국모' 눈물 스민 정동

태종 16년(1416년) 음력 8월21일. 임금이 편전에서 정사를 보다 좌우에 이른다. "계모(繼母)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유정현이 대답했다. "어머니가 죽은 뒤에 이를 계승하는 자를 계모라고 합니다."

임금이 "그렇다면 정릉(貞陵)이 내게 계모가 되는가" 하니 (유정현이) 대답했다. "그때에 신의왕후(神懿王后·태종의 생모)가 승하하지 않았으니 어찌 계모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이에 임금은 "정릉이 내게 조금도 은의가 없었다. 내가 어머니 집에서 자라났고 장가를 들어서 따로 살았으니 어찌 은의가 있겠는가. 다만 부왕이 애중하시던 의리를 생각해 기신의 재제(제사)를 어머니와 다름없이 하는 것이다"고 답했다.

임금의 말에는 독(毒)이 들어 있다. 비록 생모는 아니지만 어머니로 대접해 정성껏 제사로 드리고 하지만 '내 어머니도 아닌데 내가 제사를 지내고 보살필 이유가 뭐가 있느냐'는 뼈가 섞인 말이다.

유교를 다스림의 최고 덕목으로 삼은 조선왕조에서 '유교의 수호신'인 왕이 비록 계모지만 '어머니를 어머니로 여기지 않겠다'는 파격적인 발언을 한 셈이다. 앞으로 신덕왕후에 대한 제사 등 보살핌을 끊고 방치하겠다는 선언에 다름없는 것이다.

[서울=뉴스핌] 오승주 기자 = 서울 중구 정동의 모습. 태조가 조성한 신덕왕후의 능인 정릉의 당초 위치로 추정되는 영국대사관(성당 뒤 회색건물)이 보인다. <자료=서울연구원> 2020.07.09 fair77@newspim.com

이 일에 앞서 7년전 태종은 '어머니의 묘'를 도성 밖으로 내치는 결정을 내린다. 태종(1409년) 9년 2월23일의 일이다. 이날 태종은 정동에 있던 정릉을 옮기는데 동의한다. 그날 조선왕조실록 기사다.

'신덕왕후 강씨(康氏)를 사을한(沙乙閑)의 산기슭으로 천장하였다. 처음에 의정부에 명하여 정릉(貞陵)을 도성 밖으로 옮기는 가부를 의논하게 하니 의정부에서 상언하기를 "옛 제왕의 능묘가 모두 도성 밖에 있는데 지금 정릉이 성안에 있는 것은 적당하지 못하고, 또 사신이 묵는 관사에 가까우니 밖으로 옮기도록 하소서." 하였으므로 (태종이) 그대로 따랐다.'

태조 승하(1408년 음력 5월24일) 9개월만이다. 신덕왕후가 묻힌 정동의 정릉을 지금의 서울 성북구 정릉동으로 옮겨버린 것이다. 왕릉을 옮기는 것은 간단한 일이 아니다. 일반적으로 수맥이 흐르거나 터가 좋지 않다는 등 이유로 천장할 수 있다. 세종대왕 영릉의 경우도 처음에는 경기도 광주에 있었지만 1469년(예종 원년) 풍수지리상 길지를 찾아 옮겼다. 세종 이후 문종, 단종, 세조, 예종 등 19년간 왕이 4번이나 바뀌고, 세조와 예종의 장남이 잇따라 요절하자 천장을 단행했다.

그러나 정릉은 도성 안에 있어 불편하다는 탐탁지 않은 명분을 들어 북한산 중턱으로 옮겼다. 이후 200년 이상 정릉은 산골짜기에 방치된다.

태종에 비해 아버지 태조는 정릉 조성에 심혈을 기울였다. 조선 건국의 정치적 동지이자 공신이나 다름없던 신덕왕후의 위상을 높이 샀던 만큼 정릉 건설공사를 직접 챙겼다.

태조와 신덕왕후는 보통 사이가 아니었다. 아내이자 조선건국 과정의 건국공신이었다. 만남도 심상치 않았다. 먼 길 달려온 장수가 목이 말라 물을 찾자 우물가 처녀가 버들잎을 띄워 급체를 막는다는 스토리를 담고 있다.

[서울=뉴스핌] 오승주 기자 = 덕수궁 돌담길을 따라 뻗은 서울 정동의 모습. 2020.07.09 fair77@newspim.com

한국고전종합DB에 따르면 다산 정약용이 쓴 다산시문집 제14권 신덕기적비첩에는 태조와 신덕왕후의 만남을 묘사한 설화가 있다.

"옛날 우리 태조께서 여름철에 말을 달려 계곡을 지나다가 매우 갈증이 나므로 개울에서 빨래하는 한 여자를 보고 물을 떠오게 하였다. 그 여자는 일어나서 즉시 물을 떠오는 데 버들잎 한 움큼을 물에 띄워가지고 바쳤다. 태조가 노하여 '왜 버들잎을 섞었는가?' 하니, 그 여자가 '더울 적에 물을 급하게 마시면 몸에 해로우므로, 그것을 불면서 천천히 마시게 하려는 것입니다'고 하였다. 그러자 태조가 그를 매우 기특하게 여겨 말에 태워가지고 함께 돌아왔는데, 그가 바로 신덕왕후였다."

이 버들잎 설화는 고려왕조 건국에도 인용된다. 고려 태조 왕건이 나주 지방을 지날 때 그 지역의 오씨 성을 가진 여성이 물을 찾는 왕건에게 버들잎을 띄운 물을 바쳐 혼인에 이른다. 훗날 고려 2대왕 혜종의 어머니가 되는 장화왕후다.

1396년 음력 8월13일 신덕왕후가 판내시부사 이득분의 집에서 승하하자 태조는 열흘 뒤인 8월 23일 직접 자리를 살펴 취현방 북쪽에 능지를 정했다. 현재 정동 영국대사관 부근으로 추정되는 곳이다. 왕릉은 도성 안에 있을 수 없고, 도성 밖에 조성한다는 원칙도 무시한 채 경복궁에서 멀지 않은 장소에 정릉을 세웠다.(조선 태조비 신덕왕후 정릉의 조성과 봉릉 고찰, 황정연, 서강인문논총 46, 2016년 8월)

그러나 태조가 이처럼 공들인 정릉은 철저히 해체된다. 조선왕조 태종실록 9년(1409년) 음력 4월13일 기사에는 정릉이 파괴되는 이야기가 묘사돼 있다. 봉분은 자취를 없애고 석인(왕릉 좌우에 세우는 문인·무인상)을 땅에 묻었으며 정자각은 헐어 그 자리에 터를 높게 쌓아 태평관을 짓는 데 사용했다.

이듬해인 1410년 8월 청계천 광통교가 홍수로 무너지자 정릉의 병풍석을 광통교 돌다리를 복구하는데 사용했다. 원형을 황폐화시킨 것은 물론 제례의 대상에서도 제외했다.

[서울=뉴스핌] 오승주 기자 = 청계천 광통교 아래 받침돌로 사용된 정릉의 병풍석. 능침을 둘러싼 병풍석에는 불교와 도교 등을 표현한 문양과 조각이 새겨져 있다. 2020.07.09 fair77@newspim.com

서울 청계천 SK그룹 사옥 옆으로 흐르는 청계천에 광통교가 있다. 다리 아래 석축벽에는 일반 돌과는 다른 다양한 무늬와 그림이 새겨진 조각석이 자리 잡고 있다. 정릉을 둘러싼 병풍석이다. 부처를 정교하게 새긴 조각과 도교의 영향을 받은 구름무늬 등은 600년 세월이 흘렀어도 당당한 위품을 자랑한다. 거꾸로 뒤집힌 부처상도 있다.

뭇 백성들이 밟고 지나가면서 수모를 겪으라는 의미로 해체돼 옮겨진 정릉 병풍석은 역설적으로 수백년이 지나도 기품을 잃지 않은 모습으로 백성들과 함께 하고 있다.

◆'혁명동지'에서 '철천지 원수'로

태종이 정릉을 '철천지 원수'처럼 파괴했지만, 처음 이들은 '혁명동지'였다. 태조가 '왕씨의 고려'를 지우고, '이씨의 조선'을 건국하는데 태종과 신덕왕후는 힘을 합쳐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태조 이성계가 요동정벌에 나선 군사를 이끌로 개경으로 돌아온 위화도회군 당시 남아 있던 태조의 가족들은 '역적'으로 몰려 죽음의 위기에 처한다. 이 때 신덕왕후와 훗날 1차 왕자의 난(무인정사) 당시 죽음을 피할수 없었던 방번·방석 등 왕후 소생의 배다른 두 동생을 구한 사람은 다름 아닌 태종이었다.

태조실록 1권 총서 89번째 기사다. '처음에 신의왕후(태종의 생모)는 포천 재벽동에 있고, 강비(신덕왕후)는 포천 철현에 있었는데, 전하(태종)가 서울에 있으면서 변고가 발생했다는 말을 듣고 말을 달려 포천에 이르렀다. 전하가 왕후와 강비를 모시고 동북면을 향하여 가면서 말을 탈 때든지 말에서 내릴 때든지 모두 친히 부축해 주고, 스스로 허리춤에 불에 익힌 음식을 싸 가지고 봉양하였다. 경신공주·경선공주·무안군·소도군이 모두 나이 어렸으나 또한 따라왔으므로 전하께서 자기가 안아서 말에 태우고 길이 험하고 물이 깊은 곳에는 전하가 또한 말을 이끌기도 하였다.'

긴박한 상황에서도 태종이 신덕왕후와 그 자식들까지 직접 말에 태워 음식을 먹였다는 기록이다. 태종은 목숨을 건 도주에서 태조의 계비와 그 자식들까지 챙긴 것이다.

[서울=뉴스핌] 오승주 기자 = 수선전도에 표기된 정동. 소정동과 대정동으로 나눠져 있을만큼 규모가 상당했음을 알수 있다. <자료=수선전도>2020.07.09 fair77@newspim.com

조선 창건의 걸림돌로 지목된 정몽주를 태종이 개성 선죽교에서 죽인 이후 태조 이성계가 크게 화가 났을 때 신덕왕후가 태종을 옹호하는 장면도 조선왕조실록에 나온다.

'전하(태종)가 "몽주 등이 장차 우리 집을 모함하려고 하는데, 어찌 앉아서 망하기를 기다리는 것이 합하겠습니까. 몽주를 살해한 이것이 곧 효도가 되는 까닭입니다"고 하였다. 태조가 성난 기색이 한창 성한데, 강비(신덕왕후)가 곁에 있으면서 감히 말하지 못했다. 전하(태종)가 말하기를 "어머니께서는 어찌 변명해 주지 않습니까" 하니 강비가 노기(怒氣)를 띠고 고하기를 "공(태조)은 항상 대장군으로서 자처하였는데, 어찌 놀라고 두려워함이 이 같은 지경에 이릅니까"라고 하였다.'

정몽주를 죽인 태종이 화가 머리 끝까지 치민 태조 앞에 불려가 뭔가 사달이 벌어지려 할 때였다. 태종이 신덕왕후를 보면서 '나를 변호해 달라'고 하니, 신덕왕후가 태조에게 '태종이 결단력있게 일을 잘 처리했는데, 왜 몰아 세우느냐'면서 옹호한 것이다.

눈여겨볼 대목은 태종이 신덕왕후에게 '어머니'라고 불렀다는 점이다. 앞선 태조의 위화도회군 당시 목숨이 벼랑 끝에 달린 시점에서 태종이 신덕왕후의 자식들까지 안전하게 대피시킨 점도 '어머니'로 여기지 않으면 할 수 없는 행동이다.

하지만 이들 '혁명동지'는 조선건국 이후 '불구대천의 원수'로 갈라선다. 아버지와 남편을 새 왕조의 임금으로 세우는 과정에서는 '혁명'을 위해 뜻이 맞았지만, 태조가 신덕왕후의 아들 방석을 세자로 세우자 태종은 두 번에 걸친 왕자의 난을 일으켜 신덕왕후의 대를 끊어 버린다.

◆정릉의 부활

200년 이상 방치된 정릉은 현종 10년(1669년) 송시열의 상소 등으로 촉발된 서인들에 의해 복구된다. 신덕왕후는 왕비로 복위되면서 종묘에 위패가 모셔진다. 무덤도 왕후의 능으로 복원된다. 지금의 서울 성북구 정릉이다.

태종과 악연이 맺힌 정릉의 복원은 서인의 정략에 따른 것이라는 견해가 많다. 남인과 대립하던 서인은 정치 주도권을 잡기 위해 정릉과 신덕왕후 복귀를 이슈로 삼았다.

당시 서인과 대립하던 남인도 마땅히 반대할 명분이 없던 터라, 정릉 복위를 수차례 반대 끝에 결국 현종이 받아 들였고, 정국은 서인이 좌우하게 됐다.

200여년간 버려졌던 정릉이 제대로 왕릉의 격식을 갖추고 종묘에 배향되자 하늘에선 비가 내렸다.

실록은 이렇게 전한다. '능침을 봉하고 제를 올리던 날 소나기가 정릉(貞陵) 일대에 갑자기 쏟아져 백성들은 그 비를 일러 세원우(洗冤雨)라고 하였다.'(현종개수실록 1권, 현종대왕 행장)

[서울=뉴스핌] 오승주 기자 = 서울 성북구 정릉동에 위치한 태조의 계비 신덕왕후의 정릉. 태종이 내친 정릉은 현종 때 송시열 등 서인에 의해 복원된다. <자료=문화재청> 2020.07.09 fair77@newspim.com

정동은 '신덕왕후의 눈물'뿐 아니라 조선시대 당파의 발원지이기도 하다. 정릉을 복위시킨 서인의 발원지다.

조선후기 학자 이긍익이 지은 사서인 연려실기술 선조조고사본말(宣祖朝故事本末)에 따르면 선조 5년(1572) 이조 참의로 있던 심의겸은 당시 과거 장원 급제자 김효원이 이조 정랑에 추천되자 그가 어릴 적에 권신 윤원형의 식객이었다는 이유를 들어 반대했다.

늦게야 이조 정랑이 된 김효원은 심의겸의 아우 심충겸이 이조 좌랑의 추천에 오르자 외척(명종의 처남)이라는 이유로 이를 반대해 저지시켰다. 이후 심의겸과 김효원은 반목이 생기고, 조신들은 심의겸을 옳다고 하는 파와 김효원을 옳다고 하는 파로 나눠졌다. 심의겸의 집이 서울의 서쪽인 정동에 있었고, 김효원의 집이 동쪽인 건천동에 있어 동인과 서인의 이름이 생기게 됐다.

태종의 악연과 당쟁의 발원지에 이어 정동은 조선의 험난한 역사가 묻어 있다. 조선말 문호 개방 이후 미국과 영국, 러시아 등 각국 공사관이 들어선 땅이다. 고종이 궁궐을 버리고 러시아대사관에 몸을 피한 아관파천을 비롯해 구한말 열강의 다툼이 치열하게 벌어진 장소다.

[서울=뉴스핌] 오승주 기자 = 현재 서울 정동의 모습. 동네 전체가 공원이라고 할만큼 역사의 굴곡에도 불구하고 고즈넉하다. 2020.07.09 fair77@newspim.com

현대 서울의 정동은 동네 전체가 공원이다. 덕수궁 돌담길을 따라 경향신문사 방향으로 길은 고즈넉히 뻗어 있다.

정동 남쪽 초입 덕수궁 돌담길을 걷다보니 이문세의 '광화문 연가'가 떠오른다. 이제 모두 세월 따라 흔적도 없이 변했지만, 덕수궁 돌담길엔 아직 남아 있다. 다정히 걸어가는 연인들도 있지만, 동네 전체가 공원인 듯한 넉넉한 모습 속에 조선의 아픔도 함께 서려 있다.

fair77@newspi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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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Z플립8'에 주름 개선 신기술 뺐다 [서울=뉴스핌] 김정인 기자 = 삼성전자가 폴더블폰의 고질적인 화면 주름을 줄이기 위해 '플렉스 티타늄'을 도입했지만, 접힘부 굴곡과 단차에 대한 소비자 불만이 이어져 온 갤럭시 Z플립8은 제외됐다. 고급 기술을 상위 제품에 먼저 적용해 제품 간 차별화를 두는 전략은 기존에도 활용해 왔다. 다만 화면 주름 개선은 새로운 편의 기능을 추가하는 것과 달리 폴더블폰의 기본 사용감과 완성도에 직결된다는 점에서 이번 선별 적용의 배경에 관심이 쏠린다. 업계에서는 폴드와 플립의 서로 다른 패널 구조와 접힘 방향, 별도 설계·내구성 시험, 양산 검증 과정이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고 있다. 전작 기준 폴드7이 플립7보다 출고가가 약 89만원 높아 신기술 비용을 상대적으로 흡수하기 수월하다는 점에서 원가 부담 가능성도 거론됐지만, 삼성 측은 직접적인 이유는 아니라는 입장이다. ◆ 같은 폴더블이지만 구조는 달라 16일 업계에서는 플렉스 티타늄이 플립8에 적용되지 않은 이유로 폴드와 플립의 서로 다른 디스플레이 구조를 꼽고 있다. 플렉스 티타늄은 기존 부품의 소재만 바꾸는 기술이 아니다. 유기발광다이오드(OLED) 패널 아래에 티타늄 합금 필름을 넣고, 디스플레이 모듈을 받치는 플레이트에도 티타늄을 적용하는 새로운 적층 구조다. [AI 인포그래픽=김정인 기자] 티타늄 플레이트에는 화면을 반복해서 접고 펼칠 수 있도록 미세한 구멍을 촘촘하게 가공한다. 구멍의 크기와 간격, 배열은 패널이 접힐 때 받는 힘과 접힘 반경에 맞춰 설계해야 한다. 폴드는 화면을 세로 방향으로 접지만 플립은 가로 방향으로 접는다. 화면 크기와 비율, 접힘부위 길이, 힌지 구조와 내부 부품 배치도 서로 다르다. 폴드용으로 설계한 티타늄 플레이트와 미세 홀 구조를 단순히 줄여 플립에 그대로 적용하기 어려운 이유다. 업계에서는 플립에 같은 기술을 넣으려면 제품 형태에 맞춘 구조 설계와 내구성 시험, 양산 검증을 별도로 거쳐야 할 것으로 본다. 플립형 제품에 기술을 적용할 수 없다는 의미라기보다 이번 세대에서는 폴드용 구조의 개발과 양산 적용이 먼저 이뤄졌다는 분석이다. ◆ 원가보다 별도 설계·검증에 무게 플립8 미적용 배경으로 원가 부담 가능성도 거론됐다. 전작 기준 갤럭시 Z폴드7의 국내 출고가는 256GB 모델이 237만9300원으로, 148만5000원인 Z플립7보다 89만4300원 높았다. 업계에서는 상대적으로 가격대가 높은 폴드가 신기술 적용에 따른 부품비와 공정비 부담을 흡수하기 수월했을 가능성을 제기한다. 다만 삼성 측은 원가가 플렉스 티타늄 적용 모델을 가른 직접적인 배경은 아니라는 입장인 것으로 전해졌다. 삼성전자가 지난해 출시한 갤럭시 Z폴드7. [사진=뉴스핌DB] 수율도 변수로 꼽힌다. 새로운 적층 구조를 적용하려면 티타늄 필름과 플레이트, 접착층이 일정한 품질로 결합돼야 한다. 패널 크기와 접힘 방향이 달라지면 제조 공정과 검사 기준도 다시 맞춰야 한다. 업계에서는 폴드8에서 양산성과 내구성을 먼저 확인한 뒤 플립형 제품으로 확대하는 방식이 생산 부담을 줄일 수 있다고 본다. 차기 플립 모델의 적용 여부와 시기는 아직 정해지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 판매 비중 커진 폴드에 우선 적용 폴드의 넓은 화면도 신기술 우선 적용 배경으로 꼽힌다. 폴드는 펼친 상태에서 영상과 문서, 여러 애플리케이션을 동시에 사용하는 제품이기 때문에 화면 평탄도가 제품 완성도에 미치는 영향이 크다. 접힘부위가 길고 디스플레이 면적도 넓어 화면 전체를 균일하게 받쳐주는 하부 지지 구조도 중요하다. 삼성전자는 강성이 높은 티타늄 합금 필름과 플레이트를 함께 적용해 화면 주름과 내구성, 제품 두께를 개선했다고 설명했다. 최근 폴드의 판매 비중이 커진 점도 눈에 띈다. 지난해 국내 사전판매에서 갤럭시 Z폴드7과 Z플립7은 총 104만대가 판매됐다. 이 가운데 폴드7이 60%, 플립7이 40%를 차지했다. 삼성전자가 2019년 폴더블폰을 처음 출시한 이후 국내 사전판매에서 폴드가 플립을 앞선 것은 처음이었다. 얇고 가벼워진 폴드7의 판매가 늘어난 가운데 차세대 디스플레이 기술도 폴드8에 먼저 적용된 셈이다. ◆ 소비자 불만 남은 플립…차기 모델 주목 플립8이 신기술 적용 대상에서 제외되면서 소비자들이 체감해 온 문제를 고가 폴드 제품부터 개선한다는 비판은 피하기 어렵게 됐다. 플립은 접었을 때 크기가 작고 휴대가 편리해 폴더블폰 대중화를 이끈 제품이다. 하지만 사용 기간이 길어질수록 화면 중앙의 접힘부위가 평평하게 유지되지 않고 굴곡이 도드라진다는 불만이 이어져 왔다. 화면을 위아래로 넘길 때 손가락에 단차가 느껴지거나 접힌 부분이 살짝 솟아오른 듯한 이질감이 생기고, 밝은 곳에서는 접힘 자국이 더 선명하게 보여 사용감을 떨어뜨린다는 지적이다. 폴드8에서 플렉스 티타늄의 양산성과 실제 주름 개선 효과가 확인되면 플립형 제품에 맞춘 구조를 별도로 개발해 차기 제품으로 확대할 가능성이 있다. 다만 플립용 설계와 시험이 추가로 필요한 만큼 내년 출시 제품에 곧바로 적용된다고 단정하기는 이르다. 삼성전자가 지난해 출시한 갤럭시 Z플립7. [사진=삼성전자] ◆ 폴더블로 확대되지 않은 프라이버시 기능 갤럭시 S26 시리즈에서 처음 선보인 프라이버시 디스플레이는 차세대 폴더블 라인업으로 이어지지 않았다. 폴드8과 플립8 모두 적용 대상에서 빠졌다. 프라이버시 디스플레이는 사용자가 지정한 상황에서 화면의 시야각을 좁혀 옆 사람에게 내용이 잘 보이지 않도록 하는 기술이다. 비밀번호를 입력하거나 금융 서비스를 이용하는 등 민감한 정보를 다룰 때 화면 노출을 줄이는 데 초점을 맞췄다. 폴드는 화면을 펼쳐 문서나 메시지, 여러 애플리케이션을 동시에 사용하는 경우가 많아 주변에서 화면을 볼 수 있는 범위도 넓어진다. 이 때문에 프라이버시 디스플레이가 폴더블의 대화면 활용성을 보완할 기능으로 꼽혔지만 이번 신제품에는 반영되지 않았다. 삼성전자가 해당 기술을 향후 폴더블 제품군까지 확대할지는 아직 확인되지 않았다. 차기 제품에서 적용 범위가 넓어질지 주목된다. kji01@newspim.com 2026-07-16 1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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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해공 통합' 4년제 사관학교 대전 자운대에 세운다 [서울=뉴스핌] 오동룡 군사방산전문기자 = 국방부가 16일 '국방교육 대개혁'을 표방하며 육·해·공군 사관학교를 대전 자운대 일대에 통합하는 '국군사관학교 창설 기본계획'을 공식 발표했다. 미래 안보환경 변화와 전시작전통제권(전작권) 회복 이후 한미연합방위체제를 이끌 장교를 양성하기 위해, 기존 각 군 사관학교를 "최고 수준의 첨단 통합 사관학교"로 재편하겠다는 구상이다. 국방부는 이번 계획을 "국방교육 대개혁의 첫걸음이자, 사관학교 교육체계 전반을 재설계하는 도약적 혁신"이라고 규정했다. 안규백 국방부장관이 지난 2월 20일 오전 충남 계룡대 대연병장에서 열린 육·해·공군 사관학교 통합임관식에서 축사를 하고 있다. [사진=국방부 제공] 2026.07.16 gomsi@newspim.com 국방부는 문제 인식의 출발점으로 "지금 변화하지 않으면 미래는 없다"고 규정하며, "각 군 사관학교 병립 체계가 자원 중복과 분산투자를 초래하는 구조적 비효율을 낳고 있다"고 진단했다. 현행 육·해·공군 사관학교는 각각 약 700~1000명 규모로 일반 종합대학 단과대 수준에 불과하지만, 총 2900여 명의 생도를 양성하기 위해 3명의 3성 장군을 포함한 7명의 장성, 약 3000여 명의 지원 인력을 유지하고 있어 "규모 대비 지휘·지원 구조가 비대하다"는 것이 국방부 판단이다. 국방부는 또한 "전쟁 양상이 지·해·공을 넘어 우주, 사이버, 전자기스펙트럼 등 '다영역 통제 능력'을 요구하는 시대로 급변하고 있는데도, 사관학교 교육체계는 여전히 군종별로 분절된 구조에 머물러 있다"고 지적했다. 새로 출범할 국군사관학교는 대전 자운대 지역에 통합 신설되며, KAIST와 국방과학연구소(ADD), 항공우주연구원, 천문연구원, 전자통신연구원, 원자력연구원 등 주요 연구기관이 밀집한 과학기술 클러스터와 연계된 '스마트캠퍼스'로 설계된다. 국군사관학교 예상 조감도. [그래픽=국방부 제공] 2026.07.16 gomsi@newspim.com 국방부는 "분산·노후화된 기존 육·해·공군 사관학교 시설을 하나로 모아 과감한 집중투자를 단행, 규모의 경제가 실현된 세계 최고 수준의 통합 교육 플랫폼을 만들겠다"고 밝혔다. 교육과정은 우주·사이버·전자기스펙트럼을 포함한 AI 기반 전영역 작전을 주도할 수 있는 각 군 특성화 교육과, 전작권 회복 이후 한미 장병을 주도할 수 있는 국제 감각·소양 함양 과정으로 재설계된다. 국방부는 "현재 약 24% 수준인 사관학교 민간교수 비율을 점차 50% 이상으로 끌어올리고, 국립대학 수준 처우를 보장해 최고 석학이 장교 양성 일선에 참여하도록 하겠다"고 밝혔다. 통합 국군사관학교를 중심으로 간호사관학교, 첨단사관학교, 학군·학사장교 과정 등 다양한 교육 코스를 수용하는 '국방교육 허브'로 장기 발전시키고, 상징성이 큰 기존 사관학교 시설과 기념공간은 보존·활용 방안을 병행 마련한다는 계획이다. 국방부는 "전작권 회복 이후 한미연합방위체제를 이끌 주역을 길러내는 세계적 수준 첨단 사관학교로 도약하겠다"며 "국민 의견을 적극 수렴하는 열린 절차로 국방교육 대개혁을 추진하겠다"고 덧붙였다. gomsi@newspim.com 2026-07-16 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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긍정 영향 종목

  • Lockheed Martin Corp. Industrials
    우크라이나 안보 지원 강화 기대감으로 방산 수요 증가 직접적. 미·러 긴장 완화 불확실성 속에서도 방위산업 매출 안정성 강화 예상됨.

부정 영향 종목

  • Caterpillar Inc. Industrials
    우크라이나 전쟁 장기화 시 건설 및 중장비 수요 불확실성 직접적. 글로벌 인프라 투자 지연으로 매출 성장 둔화 가능성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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