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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YD 폴리티션 스토리](상) 박용진 "역사 잃은 지혜, 잔꾀로 흐르고 민심 없는 정치, 술수로 흐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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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1년 전북 장수 출신, "학업에 열중 안했지만 나서는 아이"
전교조 결성 당시 고등학교 세 차례 교내 시위 주도, "가장 큰 충격"
학생 운동 거쳐 진보정당 운동, 민주당에서도 소신 지켜

[서울=뉴스핌] 채송무 기자 = 박용진 더불어민주당 전 의원이 뉴스핌 KYD(Korea Youth Dream) '폴리티션스토리'에 출연해 어린 시절과 정치 입문 과정 및 가치관에 대해 이야기했다.

박 전 의원은 14일 오후 유튜브 채널 '뉴스핌TV'를 통해 공개된 폴리티션스토리에서 어린 시절에 "막 나서는 아이였다"고 회상했다. "학업에 열중하지는 않았지만 친구 관계는 좋았다"고 말했다.

박 전 의원은 고교 시절 은사였던 이수호 전태일재단 이사장이 1989년 전국교직원노동조합 결성 당시 구속된 이후 세 번의 교내 시위를 주도한 것에 대해 "저에게 가장 큰 충격이었다"고 회상했다.

그는 최장수 대변인이었던 본인의 마지막 논평이었던 '역사 없는 지혜는 잔꾀로 흐르고, 민심 없는 정치는 술수로 흐른다'는 문구에 대해 "그런 원칙을 잘 지켜야 한다는 생각을 늘 하고 살았다"고 말했다.

그는 1971년 전라북도 장수 출신으로, 집성촌이 있는 장계면에서 거주하다가 부친의 근무지 이동에 따라 전주시 태평동으로 이주했다. 그곳에서 진북초등학교를 다니다 1979년 부친이 서울로 이동하면서 서울화계초등학교에 전학해 졸업했다. 이후 신일중학교, 신일고등학교를 거쳐 현재까지 서울 강북을 지역에서 거주하고 있다.

[서울=뉴스핌] 채송무 기자 = 박용진 더불어민주당 전 의원. 2025.01.13 dedanhi@newspim.com

그는 고등학교 3학년 때인 1989년 전국교직원노동조합 결성 당시 그의 은사였던 이수호 선생이 구속된 이후 세 번의 교내 시위를 주도했고, 1990년 성균관대학교 사회과학대학 사회학과에 입학한 이후 1991년 대학 선배인 김귀정 씨가 시위 도중 숨지는 사건을 계기로 학생운동에 적극 참여하게 된다. 1994년 성균관대학교 총학생회장, 이후 서총련 산하 북부총련 의장직을 역임했다.

전역 후 진보정당 건설 운동에 적극 참여했다. 민주주의민족통일전국연합 정치부장과 1997년 9월 국민승리21의 언론부장 등을 지냈고, 대선 이후에도 권영길 전 민주노동당 대표와 함께 진보정당 운동을 이어갔다. 2011년 진보대통합 논의가 확발해진 이후 야권대통합을 주장하면서 민주당에 합류했다.

2011년 9월 '혁신과통합' 상임운영위원을 맡았고, 이후 20대와 21대 국회의원을 지내면서 이건희 삼성회장의 차명계좌 문제와 현대자동차 문제를 지적해 리콜 결정을 이끌고 유치원 3법 등의 성과를 내면서 의정 활동으로 눈길을 끌었다. 

다음은 박 전 의원과의 폴리티션 스토리 인터뷰 전문이다.

-(채송무 기자, 이하 채 기자) 안녕하세요. 정치인의 과거와 현재를 통해 미래를 살펴보는 kyd 방송의 폴리티션 스토리. 저는 진행을 맡은 정치부 채송무 기자입니다. 옆에는 함께 진행을 맡아 주실 스웨덴 린넨대의 최연혁 교수님 모셨습니다. 안녕하세요.

-(최연혁 교수, 이하 최 교수) 안녕하십니까?

-(채 기자) 오늘은 박용진 더불어민주당 전 의원님을 모시고 정치 역정과 철학에 대해 이야기를 좀 나눠보겠습니다. 안녕하세요.

▲(박용진 전 의원, 이하 박 전 의원) 예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교수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채 기자) 의원께서는 그동안 진보 정당 활동과 민주당에서도 오랜 기간 진보의 그 소신을 지켜오신 정치인이십니다. 이는 어린 시절부터 쌓여 왔을 것이라는 생각이 드는데요. 어린 시절에 어떤 소년이었나요.

▲(박 전 의원) 약간 이렇게 막 나선다 라고 해야 될까요. 친구들이 볼 때는 약간 꼴뵈기 싫은 아이일 수도 있고요. 예를 들면 봄이면 선생님을 조르고 애들 선동해서 야외 수업하도록 하고 첫 눈 오면 수업 땡땡이 치고 선생님 첫사랑 이야기 해달라고 조르고. 교실 분위기를 학구적이지 않게 만드는 데 앞장섰던 사람인 것 같아요.

생활 기록부를 보면 리더십이 있고 이렇게는 쓰여져 있더라고요. 학업에 열중하지는 않았다는 것은 분명한 것 같고, 친구 관계는 다 좋았던 것으로 기억해요. 사는 것이 순탄치 않아서 중학교, 고등학교를 전두환 정권 시절인 1987년 6월 항쟁 과정이어서 사회 변화에 대한 관심은 상당히 많았던 중학교, 고등학교 시절이었던 것 같아요.

-(최 교수) 장수에서 태어나서 초등학교를 입학하고 바로 서울로 전학을 온 케이스였는데요. 지금 살고 계신 곳에서 오랫동안 계셨더군요.

▲(박 전 의원) 아버지가 경찰이셨어요. 당시 서울에 인구가 펑펑펑 늘어나고 있을 때잖아요. 경찰서를 새로 지어서 전국에서 인원을 차출하셨는데 아버지가 어떻게 보면 운 좋게 서울로 오시게 된 것이죠. 아버지 때라서 온 가족이 서울로 왔구요. 장수에서 태어나서 초등학교 입학은 전주에서 입학을 했어요. 전주 진북 초등학교라고 유명한 학교가 있습니다. 전주 진북초등학교를 다니다가 서울 화계 초등학교를 2학년 때 전확을 왔어요.

그 동네에서 화계초등학교, 신일중학교, 신일고등학교를 나왔고, 대학교도 제알 가까운 곳이 성균관대학교더라고요. 군대도 갔다 오고 결혼도 거기서 하고, 아이도 거기서 낳고 국회의원도 거기서 하고 지금도 그냥 계속 살고 있어요.

-(최 교수) 각자마다 어렸을 때의 인생 스토리가 하나씩 있거든요 기억에 남는 사람 혹은 이벤트가 있을까요.

▲(박 전 의원) 공부를 별로 안 했다고 말씀드렸잖아요. 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 학생회 활동을 열심히 했어요. 아마 중학교 때부터 반장도 하고 고등학교 2학년 때 부학생회장이 되고, 사실상 총학생회장 역할을 다 했어요. 임기를 마치고 나도 이제 공부하자 했을 때 1989년도에 전교조가 결성이 된 것이에요. 전교조 결성 한 달 전부터 낌새는 알았고, 학생회 활동도 했었고, 부학생회장으로 역할에 집중하고 있었으니까 전교조를 지지하고 호응하는 액션을 해보자는 제안이 안팎에서 많이 왔었어요. 당시 전교조 위원장도 하고 민주노총 위원장도 했던 이수호 선생님이 고등학교 2학년 때 담임이셨어요.

친구들한테 선생님을 지지하기 위한 보호하기 위한 무엇인가를 하자고 타협안을 제시하고 선생님들이 교무회이하실 때 자율학습 시간 30분 동안 아이들을 다 밖으로 끌어내서 집회를 하기로 한 거죠. 이제 그렇게 하려니까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더라고요 방송반 반장을 불러다가 '너 방송반 열쇠 있지 그 스위치 켤 수 있지'를 다 물어보고 그때 고3 학생회장한테는 이러이러한 내용의 성명서를 쓰도록 해서 읽도록 하고 또 각 반의 반장들하고는 몇 시 몇 분에 이 방송이 나오면 그걸 신호로 '다 나와라'고 했어요.

30분 안에 이것을 다 만들어 내야 되는 일이잖아요. 그거를 했던 과정이 되게 지금도 기억에 남아요. 지금도 친구들하고 만나면 그때 얘기해요. 어떤 느낌이었는지 얼마나 두렵기도 하고 흥분됐었는지를 이야기하고 '박용진 다시 봤다'고 하는 친구들도 많았어요. 그런데 당황했어요. 어쩌면 이렇게 친구들이 일사분란하게 다 같이 움직이나. 짜기는 같이 짰지만 5분, 10분 안에 1200명이 싹 다 교문 앞으로 소리 소문 없이 움직인 것이에요.

1200명이 다 교문 앞으로 모여서 교무실에서 선생님도 몰랐대요. 수위 아저씨가 교무실로 연락해서 그때서야 선생님들이 쫒아나오셔서 '들어가라'고 난리가 났었죠. 전교조 결성이 일요일이었는데 저희가 월요일 아침 8시에 집회를 했거든요. 전교조 결성을 지지하는 고등학생의 첫 번째 집회로 기록돼 있어요. 교내 시위를 두 번 더 했었어요. 그때의 기억이 새록새록 나죠. 저한테는 가장 큰 충격이었고요.

-(최 교수) 고등학교 때부터 정치에 입문을 한 셈이네요.

▲(박 전 의원) 그게 무슨 정치겠어요. 그냥 해야 하니까 한다는 느낌이었고요. 저희가 아들이 셋이어요. 큰 형 두 분과 저, 밑에 여동생이 있는데 아버지는 딸을 갖고 싶어하셨는데 계속 아들만 나오니까. 그런데 셋째 아들이 늘 말썽인 거에요. 형들은 다 같이 신일고등학교를 다녔는데 얌전하고 학교에서 있는 듯 없는 듯, 공부 잘하고 했는데 저만 유독 튀고 그러니까 어머니 부탁이 '제발 졸업만 해라'고 부탁하셨어요.

학교에서도 그렇고 외부 압력이 들어와서 '이런 식으로 하면 졸업 못합니다'는 위협이 있었을 것 아니에요. '검정고시 치죠'라고 이야기를 했는데 어머니가 전라도 표현으로 기함을 하시면서 "고등학교 졸업하고 대학 가서 데모해라"고 하시더라고요. 그런데 대학을 가서 데모하니까 '데모 그만해라'고 그러시긴 했는데 아무튼 부모님 속 썩이는 일들은 참 많이 했던 것 같아요.

-(채 기자) 대학 시절에도 학생 운동을 하셨잖아요. 의원님이 학생 운동을 하던 시기는 약간 쇠퇴기에 빠지는 시기였던 것 같아요. 당시 학생운동이 어떤 의미가 있었을까요.

▲(박 전 의원) 그때는 전대협 세대에서 한총련 세대로 바뀌었어요. 전대협과 한총련의 가장 큰 차이는 전대협은 그야말로 국가와 민족, 민중을 위해 우리가 무엇을 할지를 고민하기 위한 대표자들의 회의인데 한총련은 그야말로 생활, 학문, 투쟁의 공동체라고 이야기를 해서 대학생으로서 찾아야 할 권리, 자신의 위무 등을 잘 성실하게 할 수 있도록 할 것이냐라고 하는 학생회 본연의 역할에 집중하자. 대학 발전과 교육 재정의 확보, 이런 쪽에 집중하자고 더 넓기도 하고 문턱이 낮은 단체를 지향했어요. 이미 달라지기 시작했던 것이에요.

학생들이 투표로 정치 권력을 견제하거나 바꿀 수 있다라는 것을 국민들이 알고 있는 마당에가두투쟁, 돌멩이와 화염병이 난무하는 방식으로 정치적 의사를 전달할 필요는 이제 없다고 다들 느끼고 있었던 시절인데, 이상하게도 다른 거는 다 앞서가던 학생운동 세력이 그런 면에서는 오히려 뒤진 거죠. 나만 옳다고 생각하고 이 변화가 두렵기도 하고 '이것은 가짜다 우리가 속지 말아야 된다'라고 하는 자기 아집이 교차되고 있었던 시절이에요.

제가 총학생회장이 되니 1 2학년 때 봤던 그런 학생들이 아니고 그런 정국이 아닌 것이에요 대통령도 노태우에서 YS로 바뀌었고요. 야당은 큰 소리치고 국민들도 투표로 여기도 혼냈다 저기도 혼냈다를 몇 번 해보기 시작했어요. 그래서 변화를 어떻게 받아들일 것이냐에 대한 고민을 꽤 많이 했던 것 같아요. 총학생회장을 하는 중에는 답을 못 얻었고 오히려 군대를 가서 느꼈거든요. 평범한 친구들이 고등학교를 막 졸업하고 대학 1학년이 되자마자 온 혹은 대학을 다니지 못하고 바로 직장을 갔던 친구들과, 저보다 나이 어린 친구들과 같이 있었을 것 아니에요

제가 5학년을 하다가 군대를 가서 25살에 갔으니까. 20살, 21살로 나보다 한참 어린 친구들이 나보다 고참인데, 이들이 하는 고민을 들어보면서 '세상이 달라지고 있고, 이들의 고민은 되게 구체적인데 나는 추상적인 것만 이야기하고 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저는 학생 운동하다가 총학생회장을 하고 잡혀자기도 하고 구속도 됐잖아요. 군대를 안 가도 됐어요. 빠질 방법이 여러 개가 있었죠. 그런데 우리 어머니가 또 '제발 군대는 좀 가라'고 하셨어요. 웬만한 부모님들은 군대 안 갈 수 있으면 안 가게 하려고 그러셨는데 우리 어머니는 그런 것이 아닌 거야.

큰 아들 군대 갔다 왔지, 작은 아들도 갔다 왔지, 그래서 아들 군대 보내면서 서운하고 아련한 것은 다 겪어본 것이에요. 뭐라고 하시냐면 "내가 너 때문에 제 명에 못 살 테니까 마지막 효도한다고 생각하고 군대 가라"는 거에요. "나 군대 안 갈 방법이 많은데"라고 했더니 "아 시끄러워. 군대 갔다 와"라고 해서 갔는데 생각해보니까 어머니 말씀 듣기를 잘한 것 같아요. 정치하면서도 떳떳하기도 하고 군대를 가서 오히려 못 봤던 것을 많이 봤거든요.

저는 되게 긍정적으로 생각하려고 하고 에너지가 좀 넘치는 타입이거든요. 아무리 힘들고 어려운 과정이라도, 감옥에 들어갔어도 늘 즐거웠어요. 즐겁고 매일매일 바쁘게 움직이고 아침 6시에 일어나서 할 일을 제깍제깍 다 해내면서 살았고, 군대에서도 그랬던 것 같아요. 군대에서도 적극적으로 하고, 못 봤던 것, 잘 만날 수 없었던 사람을 만나고, 저보다 어린 사람을 상관으로 모시면서 당하는 수모나 이런 것들도 저에게는 좋은 기억으로 승화시키려고 하는 것이 있었던 것 같아요. 군대에 가서 학생운동에 대한 정립, 제가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지에 대한 고민을 많이 가다듬었던 것 같아요.

-(최 교수) 중요한 고비고비마다 어머님의 역할이 크셨는데 아버지의 역할은 무엇이었나요.

▲(박 전 의원) 불편했죠. 아버지는 대공과 형사도 하셨는데 아들은 데모해요. 총학생회장이에요. 이른바 운동권 우두머리야. 제가 처음 총학생회장 당선되고 학교 총장과 저녁 자리가 있지만, 관할 경찰서 서장과도 식사 자리를 한번 하더라고요. 동대문경찰서 서장과 자리를 했는데 제가 "윗사람들에게 좀 전해줘라. 나 때문에 우리 아버지가 혹시라도 피해를 보거나 괴롭힘을 당하거나 하면 내가 가만히 안 있을 것"이라고 엄포 비슷한 것을 했던 것이 기억이 나요. 그런데 아머지는 평범한 경찰 공무원으로 지내셨는데 제가 처음 총학생회장을 하다가 노동자들 파업 지원 투쟁을 하다가 잡혀간 거였어요.

장안동 대공분실, 남영동은 유명한데, 장안동에도 그런 시설이 있는데 거기서 사장님으로 표현되든지 대표로 표현되는 분이 있었는데 아마 경찰서장쯤 되는 모양이에요. 무역상사로 외부는 위장이 돼 있고요. 거기 가서 조사를 한참 받고 있는데 잠깐 나오라고 해서 갔더니 사장 대공분실장이 가운데 앉고 소파가 있는데 아버지가 그 앞에 무릎을 모으고 앉아계시더라고요. 제가 들어왔는데 아버지가 이 사람한테 허리를 계속 조아리면서 "죄송하다. 자식을 잘못 가르쳐서 이렇다"고 순간 아버지한테 미안한 것도 있는데 막 화를 냈어요.

아버지께 "아버지가 무엇을 잘못했는데, 내가 무엇을 잘못했는데 이 사람한테 아버지가 이렇게 조아리고 계시냐"고 했더니 "용진아 앉아라"고 하셨어요. 저한테 별로 따뜻한 분은 아니셨거든요. 아들 둘이 있으니 셋째가 눈에 보이시겠어요. 밑에는 딸이 또 있으니까 막내 아들이 눈에 보이시겠어요. 그냥 집에나 들어오고 밥이나 먹고 다니면 다행이라고 생각을 하셨던 것 같고 저도 그렇게 생각을 했어요.

그런데 그날 그 사람한테 조아릴 때 너무 속이 안 좋았고, 가시다가 저랑 헤어지는데 주머니에서 3만원을 꺼내서 딱 주셨어요. 그때 3만원은 아버지의 일주일 용돈이었을 것이에요. 이걸 주시면서 두 가지를 이야기하시더라고요. '매 맞지 마라. 괜히 골병 든다' 그리고' 밥 굶지 마라'. 그러고 가시더라고요. 한참을 혼자 울었네. 그리고 이제 서울 구치소로 넘어갔을 때 아버지가 면회를 오셨을 것 아니에요. 그런데 아버지가 나가시더라고요. 그리고 어머니랑 이야기하다가 다음 면회 때 어머니가 오셔서 "어제 아버지가 오셔서 파란색 수위를 입은 것을 보고 눈물이 나서 나갔다"고 그러시더래요.

나가서 우셨다고 그래서 "왜요"라고 했더니 당신이 죄 지은 사람들을 잡아다 감옥에 넣고 나면 그 옷을 입고 다시 경찰서에 가서 조사 받는 모습을 봤는데 당신 아들이 무슨 죄를 지었길래 저 옷을 입고 있나 싶으니까 화도 나고 내가 왜 경찰을 하고 있나 하는 생각이 드셨대요. 그래서 나와서 막 우셨다고 그러시더라고요. 지금은 아주 효도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그때 불효를 많이 해서 너무 죄송하고, 아버지 사랑합니다.

-(최 교수) 말씀을 아주 잘하시는데 어디서 배우셨나요. 아니면 어릴 때부터 좌중을 이끄는 능려깅 있었나요.

▲(박 전 의원) 대변인은 5년을 했어요. 우리 정치사에서 최장수 대변인일 거에요. 민주노동당에서 3년, 민주당에서 2년을 했는데, 민주당에서 2년 한 것도 기록이었어요. 김대중 대통령 이후에 배지를 달지 않은 당 대변인을 2년 동안이나 했는데 그 동안 대표가 엄청 많이 바뀌었어요. 당 대표가 10번 바뀌는 동안 계속 당 대변이었어요. 다른 대변인은 계속 바뀌었는데 기자들이 박용진은 바꾸지 말라고 했다는 이야기도 있어요. 기자들하고 인연도 깊고, 험난한 시절을 같이 겪으면서 큰 대과 없이 말 실수 없이 했던 것에 대해 자부심을 느껴요.

대변인들이 사실 파리 목숨이거든요. 말 한 마디 잘못하면 휙 하고 날아가는데 그런 무리함이 없었던 것은 많은 분들이 도와주셨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고요. 말을 잘하고 말고는 스타일이었겠죠.

부모님이 물려주신 성격상도 있는 것 같은데 제가 감옥을 좀 오래 갔었어요. 나중에는 2년 3개월 동안 있었는데 그때도 계속 독방이었어요. 하루에 편지지로 A4 용지 정도로 치면 거의 3장을 앞뒤로 빽빽하게 채워서 편지를 쓰거나 일기를 써서 밖으로 내보냈어요. A4용지로 보면 한 7장을 쓰는 것인데 어떤 내용으로 채울것인지를 머리 속에 정리해놓고 한 번에 쭉 써 내려가는 과정이 매일매일 훈련을 했다고 봐야해요. 아주 작은 일을 묘사하는 훈련도 되더라고요.

제가 결혼하고 6개월 만에 잡혀가서 감옥에서 2년 3개월 있다 나왔거든요. 와이프한테 얼마나 미안해요. 매일매일 반성문을 와이프에게 써서 보냈는데 매일 사랑해요. 미안해요 이야기만 쓸 수는 없으니까 '내가 혼자 방에 있는데 거미 한 마리가 지붕에서 내려와서 집을 짓는 과정을 쭉 지켜보는 거에요. 거미줄에 햇살이 스쳐지나가고 먼지가 흩날리는 과정, 겨울해와 여름해의 비교, 아침 공기에 까치가 날아가는 모습, 까치가 바람을 타는 모습을 혹시 보셨어요? 바람을 타면 그네를 타는 것 같아요. 까치가 바람을 거슬러 가는 것을 보면서 '까치가 오늘 그네를 타네요'라고 쓴다거나 작은 푷션을 미세하게 쓰려고 하는 과정이 필력에는 도움이 크게 됐던 것 같아요. 그래서 논평을 쓸 때도 길게 안 쓰고 어떤 때는 짧게 해버렸어요. 전두환 전 대통령의 호가 일해에요. 날일 자에 바다 해자인데 그분의 고향인 합천에서 공원이 지금도 있다고 해요.

그 공원이 일해공원으로 이름을 짓고 비석을 세운다고 했는데 다른 당에서는 군사 반란 수괴에 공원 이름을 붙이는 것은 말이 안된다고 역사적인 반동행위라고 내는데 제가 냈던 논평을 '일해라고 한은 말은 횟집에나 어울린다'는 것으로 끝났어요. 더 욕할 필요도 없고, 일해라고 하는 말을 공원에 붙이지 말라는 걸로 그냥 끝났어요. 간략하게 하는 연습을 그때 감옥에 있을 때 했어요. 가장 힘들고 어려워도 나주에 다 좋게 해석하고, 그러려고 되게 노력을 많이 하는 것 같아요.

-(최 교수) 역사 잃은 지혜는 잔꾀로 흐르고 민심 없는 정치는 술수로 흐른다는 말을 남기고 이런 말을 남기고 대변인직을 내려놓았습니다.

▲(박 전 의원) 말이 멋있잖아요. 원래는 원문이 뭐냐면 '역사 잊은 지혜는 잔꾀로 흐르고 민심 잃은 정치는 술수로 흐른다'예요.그런데 제가 쓸 때는 둘 다 없는 것으로 맞췄어요. 그래서 역사 없는 지혜는 잔꾀로 흐르고 민심 없는 정치는 술수로 흐른다가 됐는데 이것은 고등학교 2학년 때, 1988년에 지하철을 타고 가는데 사계절 출판사에서 벽초 홍명희 선생의 임꺽정 광고를 지하철에 이렇게 붙여놨어요. 그 옆에 카피가 딱 그거였어요. '역사를 잊은 지혜는 잔꾀로 흐르고 민심을 잃은 정치는 술수로 흐른다'고. 우와 가슴에 확 박히더라고요. 좋은 말이야 하고 기억을 하고 있었어요. 총학생회장 선거에 나갈 때 그것을 딱 내걸었어요. 그래서 우리가 역사와 민심 팀이에요. 그리고 평생 그것을 했어요. 역사와 민심으로 움직이지 않으면 나는 그냥 술수와 잔꾀로 흘러갈 거야. 그렇게 하면 안 돼. 원칙 잘 지켜야 돼. 이런 생각을 늘 하고 살았던 것 같아요.

민주당으로 와서 2012년에 당대표 선거를 나갔어요. 한명숙, 박지원, 이인영, 박영선, 김부겸 문성근 이렇게 출마를 했어요. 이렇게 짱짱한 분들과 했는데 제가 컷오프를 통과했어요. 중앙위원회에서 박용진이 5등으로 통과했다는 소문이 있었어요. 결과는 안 알려주지만 박용진이 최고위원은 되겠구나 하고 난리가 한번 났었는데 그때 궁금해지더라고요. 이 카피 내용이 책 안에 있는 줄 알았더니 없어요. 그래서 사계절 출판사에 전화를 했죠. 그랬더니 자기도 모른데요. 사장님이 아실까요 했더니 연결을 해주더라고요.

그때가 2012년인데 제가 상황을 설명하고 제가 누구라고 했더니 '어떻게 그것을 기억하시냐'고 그러는데 "남편이 원래 사장이었는데 돌아가셨대요. 그리고 대표를 맡으셨는데 남편이 벽초 홍명희 선생의 임꺽정을 발행하실 때 그냥 거기다 쓴 카피였대요. 그런데 어떻게 이런 글을 뽑아내셨는지 모르겠다. 어디서 보신 것이 아니냐고 했더니 자기는 모르고 아마 남편이 본인이 했을 가능성이 많다. 그런데 그 문구를 인터넷에 검색해 보면 박용진 쓴 걸로만 나와요.

아마 사계절 출판사 사장님이 처음 쓰셨을 것 같아요. 말씀 그대로 저는 역사와 민심을 가지고서 정치를 해야지 잔꾀와 술수를 부리면 지금 당장은 어떻게 보면 살아날 수 있다고 봐요.지금 당장은 배지 잃지 않고 뭐 재선 3선 4선 5선 6선 선수는 쌓여 나갈 수 있겠죠. 그런 선수가 쌓이면 뭘 합니까. 잔꾀와 술수로 평가돼 버리면 끝이지. 어릴 때 고등학교 2학년 때 봤던 글귀를 지금까지 잊지 않고 계속 해가고 있어요.

-(최 교수) 그 말의 출처에 대해서는 오늘 처음 들었습니다. 

dedanhi@newspi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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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폰 듀오 내년 1월까지 배송 지연 [서울=뉴스핌] 서영욱 기자, 심재민 인턴기자 = 애플의 첫 폴더블 스마트폰 '아이폰 듀오'가 사전예약 직후 품귀 현상을 빚으며 배송 일정이 내년 1월까지 밀렸다. 이례적인 수요에 따른 흥행 신호로 해석되고 있지만, 실제로는 생산 수율 저하와 핵심 부품 공급 차질이 물량 부족을 심화시켰다는 분석이 나온다. 생산이 안정화되지 않은 상황에서 70여개국 동시 출시를 추진한 애플의 전략적 판단도 공급난을 키웠다는 지적이다. 애플의 첫 폴더블 스마트폰 '아이폰 듀오' [사진=로이터 뉴스핌] ◆ 10대 중 4대 품질 기준 미달…증산에도 공급난 지속 21일 정보기술(IT)업계에 따르면 아이폰 듀오는 지난 16일 사전예약을 시작한 지 30분 만에 일부 모델의 배송 예정일이 내년 1월로 미뤄졌다. 오는 23일 정식 출시를 앞두고 있지만, 지금 주문하면 제품을 받기까지 약 3개월을 기다려야 하는 셈이다. 애플은 사전예약 수요가 이례적인 수준이라고 평가했다. 그러나 실제 예약 건수와 초기 공급량이 공개되지 않은 만큼 장기간의 배송 지연을 수요 폭증만으로 설명하기 어렵다는 지적이 나온다. 핵심은 생산 수율이다. 중국 경제매체 지몐신문은 지난달 21일 폭스콘 공급망 관계자를 인용해 아이폰 듀오의 완제품 조립 수율이 9월 17일 기준 60%를 조금 웃도는 수준이라고 보도했다. 생산된 제품 10대 중 4대 가까이가 품질 기준을 충족하지 못한다는 의미다. 당시 공급망 관계자는 애플의 품질 기준을 유지할 경우 생산라인이 안정적인 수율에 도달하기까지 6개월에서 1년이 걸릴 수 있다고 내다봤다. 수율 문제는 최근까지 이어지는 것으로 보인다. 메리츠증권은 지난 19일 보고서에서 외장 힌지와 초박형유리(UTG) 등 핵심 부품뿐 아니라 최종 조립 단계에서도 수율 부진이 발생해 생산 확대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분석했다. 애플이 공급망 주문량을 늘리고 있지만 단기간에 물량 부족을 해소하기 어려운 이유다. 중국 증권시보는 지난 10일 애플이 아이폰 듀오의 부품 주문량을 기존보다 30% 늘렸다고 보도했다. 그러나 부품 확보량을 늘리더라도 최종 조립 수율이 개선되지 않으면 실제 출하량을 확대하는 데 한계가 있다. 애플의 폴더블 스마트폰 '아이폰듀오' [사진=블룸버그통신] ◆ 70여개국 동시 출시 강행…국내 초기 물량 3만대 공급 부족을 예상하고도 글로벌 동시 출시를 선택한 판단 역시 도마 위에 올랐다. 블룸버그는 지난 18일 애플이 당초 미국과 중국에 먼저 출시한 뒤 판매 국가를 확대하려던 계획을 바꿔 70여 개 국에서 동시에 사전예약을 시작했다고 전했다. 제한된 초기 생산 물량을 여러 국가에 배분하면서 공급 부담이 커졌다는 분석이다. 국내에서도 물량 부족이 현실화하고 있다. 통신업계가 파악한 아이폰 듀오의 한국 초기 공급 물량은 약 3만대 수준이다. 통신 3사의 일평균 스마트폰 개통량인 약 2만대와 비교하면 이틀 치에도 못 미친다. 통신사들은 첫 폴더블 아이폰 출시를 앞두고 고객 유치에 나섰지만 물량 확보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제품 수령 지연에 따른 고객 문의와 불만까지 유통 현장에 집중되면서 정식 출시 이후에도 혼란이 이어질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IT업계 관계자는 "현재의 품귀 현상을 폭발적인 수요에 따른 흥행으로 단정하기는 어렵다"며 "생산 차질이 장기화하면 출하 목표 달성이 어려워지고 삼성전자 등 경쟁사가 반사이익을 얻을 수 있다"고 말했다. flurry327@newspim.com 2026-10-21 15: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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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은 사망설, 왜?…"독재 체제가 불러온 고질병" [서울=뉴스핌] 이영종 통일북한전문기자 = 북한 국무위원장 김정은(42)이 뇌출혈로 쓰러져 중국 병원에서 숨졌다는 소문이 한반도를 넘어 지구촌을 뒤흔들었다. 결론부터 말하면 이번 사망설은 아무런 근거가 없는 가짜뉴스다. 의료기록이나 목격자, 하다못해 정황을 뒷받침할 만한 최소한의 방증이나 전언도 없는 것으로 파악된다. 그런데도 소문은 외신에서 사회관계망서비스(SNS)와 유튜브는 물론 국내 언론과 증권가까지 순식간에 번졌다. 사망설 자체보다 이 소문 앞에서 우리 사회가 보인 허술한 대응이 더 큰 문제라는 지적이 나온다. [서울=뉴스핌] 북한 국무위원장 김정은이 지난 19일 '전국 피복·신발전시회-2026' 전시장을 찾아 간부들에게 뭔가를 지시하고 있다. 김정은의 오른쪽은 딸 주애. [사진=북한매체 종합] 2026.10.20 ◆'중국 반체제 인사의 X 글'에 휘둘려 메가톤급 소문의 진원지는 미국에서 활동하는 중국 반체제 인사 셰완진(謝萬軍)이다. 그는 19일 자신의 X(옛 트위터)에 "전해지기로 김정은과 시진핑이 같은 병에 걸렸다. 김정은은 죽었고 시진핑은 죽음이 아직 멀었을까"라는 취지의 글을 올렸다. 이어 김정은이 갑작스러운 뇌출혈로 의식을 잃었고 북한의 열악한 의료 여건 때문에 중국에 도움을 요청해 중국 의료진이 급파됐다고 주장했다. 베이징의 병원으로 옮겨 수술을 받았으나 골든타임을 놓쳐 결국 사망했다는 얘기다 시신은 북한으로 비밀리에 운구됐고 북한은 이를 숨기고 있다는 내용도 덧붙였다. 이런 엄청난 이야기를 던지면서도 그는 어떤 출처나 근거를 제시하지 않았다. 셰완진이 중국에서 불법단체로 규정된 '중국민주당 주석'을 자처하며 시진핑 주석 사망설이나 대역설 같은 허위·날조 사실을 SNS에 올려온 인물이란 점에서 신빙성은 떨어진다.  그런데도 영국 더선 등 해외 매체들이 이를 받아 전하면서 소문은 증폭됐고 여기에 김정은의 여동생인 김여정 노동당 부장의 권력 장악설이나 중국군 파병설까지 얹혔다. 근거 없는 이야기에 그럴싸한 살이 덧붙여지면서 가짜뉴스는 눈덩이처럼 커졌다. 사실 사망설이 한창 번지기 시작한 19일 김정은은 부인 이설주, 딸 주애와 함께 평양에서 열린 '전국 피복·신발 전시회-2026'을 참관했다. 이튿날 북한 관영매체들은 여러 장의 사진과 함께 이를 보도했다. 하지만 집요한 가짜뉴스는 이를 견강부회식으로 해석했다. '사망 사실'이 퍼지니 북한 당국이 이를 은폐하고 기만하기 위해 거짓으로 김정은과 가족의 일정을 공개한 것이란 주장까지 내놓으면서 그럴듯하게 포장을 했다. ◆'뇌졸중 쓰러져 中병원 이송'…뻔하고 반복된 레퍼토리 눈여겨볼 대목은 김정은 사망설에서 드러나는 클리셰(Cliché)다. 뇌출혈로 쓰러졌다거나 북한 의료진이 속수무책이라 중국 병원으로 옮겼다, 혹은 시신은 몰래 평양으로 반입했다는 등의 레퍼토리는 과거 북한 지도자의 신변 이상설이 나올 때마다 되풀이된 판박이다. 과거 북한 최고지도자의 사망설 확산 사례를 돌아보면 그 패턴이 드러난다. 1986년 11월 김일성 주석 피격 사망설이 나왔다. 당시 외신과 국내에서 소문이 크게 부풀렸고 최전방 북측 지역에 조기가 걸렸다는 말까지 나왔다. 결국 김일성이 얼마 뒤 공개석상에 모습을 드러내면서 오보로 판명됐다. [서울=뉴스핌] 지난 2011년 12월 28일 평양 금수산태양궁전 앞에서 열린 김정일 국방위원장 장례식에서 아들이자 후계 최고권력자인 김정은 국무위원장(당시 직책은 당중앙군사위 부위원장)이 운구차 옆을 걷고 있다. [사진=북한매체 종합] 2026.10.20 2008년 9월에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정권수립 60주년 행사에 불참하면서 와병설이 퍼졌다. 이 경우는 뇌졸중으로 수술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사망설과는 별개였고 김정일은 이후에도 3년 넘게 통치했다. 정작 2011년 12월 김정일의 실제 사망은 이틀 가까이 지난 뒤에야 공식 발표됐다. 김일성 주석 때도 1994년 7월 사망 후 하루 이상 지나서 발표됐다. 소문은 엄청나게 번지고 정작 진짜 사망 때는 깜깜무소식으로 있다가 북한 발표가 나오고서야 알게되는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김정은 집권 이후에도 이런 양상은 이어졌다. 2014년 9~10월 김정은이 약 40일간 공개 활동을 하지 않아 유고설이 불거졌지만 지팡이를 짚고 다시 나타났다. 과체중으로 추정되는 다리 혹은 관절 수술 때문으로 파악됐다. 2020년 4월에는 김일성 생일 참배 불참을 계기로 심혈관 수술 후 위중설, 사망설이 퍼졌다. 일부 정치인이 "99% 확신한다"고까지 단언했지만, 김정은은 20일 만인 같은 해 5월 1일 순천인비료공장 준공식에 모습을 드러냈다. 지난해 5월에도 원산에서 현지지도 중 의식불명 상태에 빠졌다는 소문이 외교가와 증권가를 중심으로 돌았다. 번번이 오보로 끝났지만 가짜뉴스와 소문은 '죽지 않는 각설이'처럼 주기적으로 존재감을 과시한다. ◆'일단 베껴 쓰고 보자'…줏대 없이 흔들린 언론 이번 사태에서 가장 뼈아픈 대목은 언론의 대응이다. 유력 외신뿐 아니라 우리 언론도 줏대 없이 흔들렸다. 확인되지 않은 소문이 확산일로를 걸으니 '일단 베끼거나 받아쓰고 보자'는 심리가 작동한 것으로 보인다. 남이 쓰니 나도 쓰고, 안 쓰면 낙종이 될까 불안해 쓰는 식이다. 그 결과 독자와 시청자, 국민은 전례 없는 혼란을 겪었다. 소문이 가장 먼저 들이닥친 주식시장은 출렁였고, 포털과 SNS에는 확인되지 않은 정보가 넘쳐났다. 유튜브 일부 채널과 콘텐츠는 한술 더 떴다. 자극적인 제목과 섬네일을 앞세워 사망설을 기정사실처럼 다루며 혼란을 부채질했다. 조회수와 수익이라는 상업적 계산 앞에서 최소한의 사실 확인 의무는 실종됐다. 필자 또한 이번 사태의 한복판에서 적지 않은 시달림을 겪었다. 수많은 지인과 독자들로부터 '정말 사망한 것이냐', '평양이 지금 난리라는 데 파악해 볼 수 있냐'는 문의 전화와 질문 공세가 쏟아졌다. 지난 34년간 북한 취재 현장에서 여러번의 '사망·유고설'을 겪었지만 이번은 유독 파장이 크다. 최근의 남북관계와 북한 김정은과 김여정 남매의 비정상적이고 호전적인 도발 상황이 국민이 불안감을 키운 것이란 생각도 든다. ◆'강 건너 불구경'식 정부 대응도 문제 정부 대북부처의 대처도 비판받을 소지가 많다. '가짜뉴스 엄정 대응'을 공언해 왔지만 이번엔 사실상 강 건너 불구경하듯 했다. 국가정보원은 지난달 30일 국회에 김정은의 체중이 약 140kg에 이르러 심혈관계 질환 위험이 높다고 보고한 바 있다. 이런 상황이라면 소문이 돌 때 더욱 신속하고 구체적인 사실관계 설명이 필요했다. 책임 있는 당국자가 직접 나서 구체적인 사실관계를 설명하고 소문을 일찍 진화했어야 했다. 국회 정보위원회의 대응도 도마에 오른다. 정보위가 국정원 긴급보고를 받아 사망설이 가짜라는 점을 확인하고, 즉각 공개했더라면 불필요하고 소모적인 논란을 차단할 수 있었다는 지적이 나온다. 국가 안보와 직결되는 사안일수록 정보위가 정치적 계산을 앞세우지 않고 사실을 확인해 국민에게 알리는 역할을 해야 한다.  서울 내곡동 국가정보원 본부 청사와 원훈석 [뉴스핌 자료사진] ◆전문성 키우지 못한 언론도 책임 느껴야  이번 사태의 근본 원인은 북한 체제의 폐쇄성에 있다. 더구나 김정은 한 사람에게 모든 권력이 집중된 수령 유일지배 독재체제다. 김정은이 유고상황에 빠지면 대책이 없어진다. 이런 사정에 있다보니 '사망설'을 비롯한 소문의 파괴력은 클 수밖에 없고, 거짓인 줄 알면서도 시장과 사회가 뒤흔들리는 기형적인 상황이 현실로 나타나는 것이다. 정보의 불투명성과 체제의 취약성이 만나 만든 구조적 고질병이라 할 만하다. 하지만 우리 언론의 책임도 결코 가볍지 않다. 북한 보도가 지라시 수준의 글에 휘둘리는 이유는 전문성을 갖춘 저널리스트를 제대로 키우지 못했기 때문이다. 한때 언론사들이 전문기자를 두고 연구소 등을 운영하기도 했지만 경영 논리와 남북관계 경색에 밀려 유명무실해졌다. 북한 정보의 진위를 가려낼 안목과 취재 네트워크를 갖춘 기자가 줄어들면서 확인되지 않은 SNS 글 한 줄에 증시와 언론, 여론이 함께 휘청이는 모습이 연출됐다. '김정은 사망' 같은 민감한 대북 정보는 우리의 안보와 남북관계, 한반도 정세에 미칠 파장이 크다. 이번 일을 일과성의 해프닝으로 넘길 일이 아니다. 제대로 된 진단과 대책마련이 없으면 김정은은 앞으로도 몇 번이고 죽을 수밖에 없을 것이고 그때마다 우리는 휘둘리게 될 것이 분명하다. 정부 대북 부처와 유관기관, 언론, 학계 등이 재발 방지를 위한 대책 마련을 서둘러야 한다. yjlee@newspim.com 2026-10-21 0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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긍정 영향 종목

  • Lockheed Martin Corp. Industrials
    우크라이나 안보 지원 강화 기대감으로 방산 수요 증가 직접적. 미·러 긴장 완화 불확실성 속에서도 방위산업 매출 안정성 강화 예상됨.

부정 영향 종목

  • Caterpillar Inc. Industrials
    우크라이나 전쟁 장기화 시 건설 및 중장비 수요 불확실성 직접적. 글로벌 인프라 투자 지연으로 매출 성장 둔화 가능성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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